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입학 예비고사 (문단 편집) == 개요 == {{{+1 大學入學 豫備考査}}} 1969학년도(시험 실시는 1968년)부터 1981학년도(시험 실시는 1980년)까지 실시한 [[국가]] 주관의 [[일제고사]](一齊考査)[* 전국의 모든 학생이 일제히 치른다는 의미다. 일본과는 무관하다.] 형태의 대학 시험. 1970년대에는 예비고사 + 대학별 본고사 형태로 입시가 진행되었다. 도입 초기에 예비고사는 합격, 불합격의 의미만 있었고, 본고사가 당락을 좌우하여 영향력이 없었으나, 1974년부터 예비고사와 본고사 점수를 합산하여 뽑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예비고사가 매년 어려워짐에 따라 변별력이 상승하여 70년대 후반에는 본고사보다 예비고사가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70년대말에는 전문대나 하위권 대학에서 본고사를 출제하지 않고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면서 예비고사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예비고사를 도입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각 사립대학의 입시 부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대학별고사 체제하에서 입시는 전적으로 각 대학에서 관리 감독하였고, 이에 따라 무학력자가 합격하는 등 입시부정 무제가 끊임없이 야기되었다. 입시부정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 대학 입시를 관리 감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결국 일제고사 형태의 예비고사가 시행되게 되었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일제고사로 입시의 공정성을 어느정도 담보하겠다는 것이 예비고사의 주요 도입취지였다. 예비고사를 통해 학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걸러내 무자격자의 대학 합격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예비고사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이러한 도입 취지는 매우 성공적으로 이행되었고, 대한민국에서 대학 입시 부정을 근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입시 제도가 되었다. 또한 예비고사라는 전국 단위의 시험이 시행됨에 따라 경기중-경기고-서울대로 그대로 이어지며 좁은 문으로 통했던 명문대 입시의 길을 지방의 학생들에게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별고사에서 고교 교과 과정에서 벗어나는 문제가 많이 출제되어 문제가 되었고 이는 일부 명문고 출신 학생들에게 현저히 유리했었다. 하지만 예비고사의 도입으로 교과과정을 충실히 공부한 학생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실제로 예비고사 도입 직후부터 지방 학생들의 서울대 진학률이 치솟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도 교과 과정만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히 명문대에 갈 수 있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서울의 명문중고교로 유학을 보내던 지방 부유층의 세태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1980년 7.15 교육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모든 학원 및 과외가 금지되고 공교육의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도 금지되었으며, 대입 본고사가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예비고사는 1981년(1982학년도)부터는 [[대학입학 학력고사|학력고사]]로 명칭이 변경되어 시행되었다. 첫 예비고사 세대는 [[1950년]]생, 마지막 예비고사 세대는 [[1962년]]생[* 본고사를 치른 것은 [[1961년]]생.]이다. 현재 [age(1962-12-31)]~[age(1950-01-01)]세이다.[* 마지막 예비고사 세대가 65세가 되는 [[2027년]]쯤을 기점으로 예비고사 세대는 모두 노인이 된다(만약 그때까지 노인의 기준이 65세 이상으로 유지된다면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